공부/번역

François Dosse, 〈Les engagements politiques de Gilles Deleuze〉

Galpie 2024. 10. 22. 21:54

질 들뢰즈의 정치적 참여들(Les engagements politiques de Gilles Deleuze)[각주:1]

프랑수아 도스(François Dosse)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지평은 들뢰즈의 모든 사유에 물을 대는 역할을 했다. 그의 여정은 참여들(engagements)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이는 그의 선배 사르트르가 같은 시기 동안 구현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국가 이성에 맞서는 정의의 대변자이자 보편적인 지식인의 원형으로서의 앙가주망과는 꽤나 다른 의미로 그러했다. 그의 친구 푸코가 정의한 방식대로, 그는 그의 능력을 도시를 위해서 사용하는 특수한 지식인으로서 더 많이 자리 잡아왔다. 제한적인 논의 안에서 우리는 들뢰즈가 정치적인 장에서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개념들의 창조라는 작업대를 떠나있었던 와중의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데에 전념하지만,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철학자와 정치가 사이에 어떤 단절이 있었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흄에 대한 최초의 작업부터 잠재성에 관한 그의 마지막 성찰들까지, 모든 그의 저작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적인 힘들의 부단한 재개와 제도적인 속박의 무력화라는 정치적인 공간 안에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론의 여지 없이, 1958년 5월에서 시작된 그의 도정과 그 결과로 생겨난 펠릭스 가타리와의 만남은 그의 정치적 참여의 가시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이런 행동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 두 사람이 어떤 입장을 갖기에는 너무나도 어렸을 때 겪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트라우마라는 그들에게 공통된 역사적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야만을 향한 그들의 저항은 지연되었고, 우리는 그들의 반항이 서구와 서구의 가치들에 대한 나치즘의 일시적인 승리로 재현되었던 대혼란의 뒤늦은 결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가설까지도 세워볼 수 있다. 새로운 개념들을 창조하는 것은 나치의 야만성에 대한 트라우마가 사유의 새로운 임무를 재개하도록 강제할 때 어떤 지상 명령이 된다. 사유하기란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하여 너무나도 빠르게 지나가 버린 사건에 사건다움을 부과하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단절은 들뢰즈가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을 다시 취하는 영화의 역사에 대한 접근의 중심에서 또한 찾아볼 수 있다.

 

   철학은 역사적 비극과의 교차에 무방비하게 나와 있어서는 안 된다. 그와는 정반대로, 자신의 기능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우리는 더 이상 사유할 능력이 없으며, 우리 모두가 나치즘에 대해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각주:2] 그러면서도 프리모 레비가 작열감과 함께 “인간이라는 수치”로 정식화한 느낌에 머물러만 있어서도 안 된다. 우리 각자는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치즘에 더럽혀져 있다. “그것은 분명 재난이다. 그러나 그 재난이란, 형제들 혹은 친구들의 사회가 그토록 엄청난 시련을 겪고 나서 ‘피곤함’과 경멸 없이는 더 이상 서로를, 심지어는 스스로를 바라볼 수 없게 된다.”[각주:3] 아우슈비츠 이후, 더 이상 그리스인들의 천진함을 가질 수는 없다. 들뢰즈는 이로부터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생명의 힘들을 두둔하고 죽이려는 충동(les pulsions mortifères)을 좌절케 하기 위해 자연/문화라는 단절을 넘어설 또 다른 형이상학을 정식화할 필요성을 연역해냈다. “수치심은 철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희생자들에 대한 책임은 없지만, 그래도 그들 앞에 서 있다.”[각주:4] 들뢰즈에 따르면, 인간을 그의 생활 세계로 다시 돌려놓고 이렇게 잃어버린 통일성을 되찾기 위하여 인간의 탈중심화를 따라 더 멀리까지 나아가는 것이 문제이다.

 

   디오니스 마스콜로(Dionys Mascolo)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증언하는 바와 같이[각주:5], 들뢰즈는 이와 같은 사유의 전환이 긴급하게 요구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1987년 마스콜로의 저서 『기억하려는 노력의 둘레에서(Autour d’un effort de mémoire)』가 출간된 직후, 들뢰즈는 마스콜로에게 편지를 썼고 그가 사유와 삶의 관계를 얼마나 강렬하게 갱신하였는지에 대한 찬사를 보낸다. 들뢰즈는 그러면서 마스콜로의 “이러한 일반적인 감각의 전복은 사유의 새로운 경향들을 틀림없이 추동할 것이다”[각주:6]는 주장에 넌지시 질문을 던진다. 들뢰즈는 마스콜로가 어떤 비밀을 담고 있음을 간파했다. 마스콜로는 들뢰즈에게 그의 눈에 뜨인 비밀이란 “다른 게 아니라, 아마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사유에 대해 불신하는 사유입니다. 고민 없이는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각주:7]라고 대답한다. 비밀을 지키려는 의지는 없지만, 이런 고민에서부터 가능한 우정들의 토대가 탄생한다고 마스콜로는 덧붙인다.

 

   들뢰즈는 마스콜로에게 보내는 답신에서 순서를 뒤집을 것을 제안하며 우정을 이차적이고 보상적인 것이 아니라 일차적인 그리고 토대로서 바라보기를 요청한다. “당신에게, 그리고 블랑쇼에게도 또한 우정이 있습니다. 이는 ”필로소피(philosophie, 철학, 지혜를 사랑함)“에 대한 전면적인 재평가를 함축하는데, 당신들만이 필로스(philos, 사랑함)라는 단어를 문자 그대로 이어받기 때문이지요.”[각주:8] 이런 경험과 기억을 가로지르는 것은 사유의 역사에서 통용되는 몇몇 정설들을 원점으로 돌이켜 비판이라는 거름망을 통과하게 만든다. “어떻게 (하이데거의) 개념들이 비열한 재영토화에 의해 내생적으로(intrinsèquement) 오염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각주:9] 해방의 생성들을 예비하기 위해, 그는 창조라는 필연성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현재에 대한 저항이 결여되어 있다. 개념들의 창조는 그 자체로서 미래의 어떤 형식에 구원을 청하며,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대지와 새로운 민중을 부른다.”[각주:10]

 

   비루함을 피하기 위해서는 창조된 개념들을 실험해 보아야 한다. “사유한다는 것은 실험한다는 것인데, 실험이란 항상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각주:11] 본질적으로 철학적인 실험은 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어떤 영토도 이용할 수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옆에서 견뎌냈고 사후적 트라우마 또한 남았지만, 그 대신 68년 5월이라는 장래의 사건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그들 시대의 쟁점들에 유달리 민감했던 그들은 창설적 단절이라는 가치를 즉시 알아보았다. 들뢰즈는 비록 그의 친구 가타리처럼 전투적인 혁명 활동가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 사건은 그들이 만나게끔 그리고 어떤 결실을 맺게끔 만들었다. 68년 5월 없이 이러한 만남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었으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68이라는 사건은 그들의 창조적인 힘의 결합을 해방하는 데 필수적인 흐름의 절단이었다.

 

   그들의 첫 공동 저작인 『안티 오이디푸스(L’Anti-Œdipe)』는 명백히 세계에 대한 혁신적인 사유의 양식을 개괄하는 5월의 혁명에 뿌리내리고 있다. 훨씬 후인 1984년,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다시 쓴 글에서 변절자들만이 그 사건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할 뿐이라고 하면서, 그 사건은 사회의 내부를 통과하듯이 개인의 내부를 통과한다고 쓴다.

 

창설적 절단 : 68년 5월

   68년 5월, 들뢰즈는 리옹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고 학생들의 기성 질서에 대한 저항을 즉각 받아들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지지를 선언한 몇 안 되는 교수 중 하나였으며, 리옹 학생들이 주최한 여러 총회와 시위에 참여했다. 심지어 그는 철학과 교원 중에서는 유일하게 이 운동에 모습을 보인 사람이었다. 그는 절대로 교훈을 가르치려는 사람의 태도를 취하지 않은 채로 공감하고 듣고자 했다. 다시 말해, 들뢰즈는 이 운동에 전적으로 동조했었다. 1968년 5월 10일 금요일 그의 논문 지도 교수인 모리스 드 강디약(Maurice de Gandillac)이 리옹에 있는 그의 집에 들렀을 때, 들뢰즈의 자녀들인 줄리앙과 에밀리는 벽보와 붉은 깃발, 발코니에 걸려있던 현수막으로 그를 맞았다. 들뢰즈 가(家)가 저녁 식사 자리에 지네트 콜롬벨(Jeannette Colombel)과 그의 남편을 초대한 5월의 어느 밤에는, 한 학생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대학생들의 항의 피켓 시위와 싸우기 위한 극우파의 강제력 개입 시도가 준비 중에 있다고 알리는 일도 있었다. “질과 나, 우리들은 우리 학생들과 결합하기 위하여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각주:12] 리옹 대학교의 분위기 속에서 그가 예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68년 가을에는 박사 학위 논문을 끝마치고 논문 심사를 받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만큼, 5월의 운동을 마주하는 이런 감각은 들뢰즈에 있어 특기할 만하다. 들뢰즈는 리무쟁(Limousin) 지방의 마스 레베리(Mas Revery)에 있는 가족 사유지에서 그의 학위 논문을 최종 교정하는데에 그의 여름을 다 바쳤다. 이렇게 과로했던 그는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항생제 내성균에 의한 결핵이 재발했고 그의 폐 한쪽에 커다란 흉터를 남겼다는 진단을 받게 된다. 그는 응급 입원을 해야 했지만, 1969년 1월로 연기된 논문 심사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곧바로 수술을 받지는 않았다. 그렇게 들뢰즈는 1969년 초 소르본에 5월 혁명 이후에 이에 대한 입장 대립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옹호하는 편에 선 초기 논문들 중 하나를 발표한다. 1968년 출간된 그의 학위 논문, 『차이와 반복』은 철학사의 긴 시기에서 벗어남으로써 그의 고유한 철학적 입장을 개진하는 위대한 저작이다.

 

   학위 논문 심사 이후, 들뢰즈는 매우 심각한 수술인 흉부성형수술을 받아야만 했고, 이는 그에게 한쪽 폐만을 남겼으며 반복적인 링거 주사와 생의 마지막 날까지 계속해서 호흡 곤란을 겪게 만들었다. 이 수술 이후 들뢰즈는 리무쟁의 사유지에서 모든 번잡함에서 벗어나 아내와 함께 요양하며 긴 휴식기를 갖게 된다. 몸이 쇠약해져 불가피하게 임시 퇴직 중이던 이 한산한 시기에, 들뢰즈는 펠릭스 가타리와 그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결정적인 만남을 갖는다. 68년 5월 없이, 이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68년의 사건은 이 두 명의 새로운 벗들이 창조적인 힘을 해방하는 데에 필수적인 흐름의 절단이다.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가 말한 것과 같은 이러한 “창설적 절단(rupture instauratrice)”에서 느껴지는 생의 도약(élan vital)을 향한 전념을 들뢰즈도 가타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1967년 들뢰즈에 의해 무수히 원용되었던 조에 부스케(Joë Bousquet)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들에 의연해짐이, 관통 당해 찢어진 상처를 해방적 생성으로 변형함으로써 그 상처로부터 도래하는 희미한 빛을 짊어짐이 바람직하다. 그들의 첫 공동 저작인 『안티 오이디푸스』는 현대 세계에 대한 혁신적인 사유의 양식에 대한 윤곽을 제공한 68년 5월의 혁명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 시기의 지적인 격동의 자국을 간직하고 있다. 이 최초의 공동 작업의 출간에 대해 논평하며, 펠릭스 가타리는 “1968년 5월은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질Gilles과 나에게 하나의 위기였어요. 우리는 서로 알지 못했으나 이 책은 현실적으로 어쨌든 5월의 연속입니다.”[각주:13]라며 그들이 어디에 닻을 내리고 있는지를 확실히 한다.

 

GIP (감옥 정보 그룹) : “전쟁 기계”의 한 모델

   심각한 호흡기 문제로 투쟁적 활동에 제약이 있었지만, 들뢰즈는 그럼에도 예외적으로 그의 친구 푸코에 의해 1970년대 초 만들어진 조직인 GIP(Groupe d’information sur les prisons, 감옥 정보 그룹)에는 참여한다. 이 그룹은 철저히 마오주의적 흐름과 GP(Gauche prolétarienne, 프롤레타리아 좌파. 프랑스 마오주의 정당)의 투쟁 활동가들을 보호하려는 의지에서 생겨났지만, 최초의 목적에서 빠르게 자율화되었다. GIP는 감옥마다 하나의 그룹이라는 기준으로 전적으로 탈중심화된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파리의 이러한 모델은 활동가들이 수감되어 있는 다른 지방의 감옥들로 매우 빠르게 확산된다. 실천적이고 효과적인 저항에 의해 인도되는 모임을 구현하는 듯 보이는 동시에 스스로를 미시-구조로 규정하면서 중앙집중제 그리고 관료적 기구의 모든 형식과 절연하였던 이런 조직화 유형은 곧바로 들뢰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GIP는 중앙집중적이지 않은 몇 없는 좌파적인 그룹 중 하나였다... 푸코는 지도자처럼 행세하지 않는 법을 알았다.”[각주:14] 1971년 9월 클레르보(Clairvaux) 감옥에서 뷔페(Buffet)와 봉탱(Bontens)이 인질극을 벌이고 그들을 처형한 이후 감옥들에서 커져가는 긴장을 핑계로 그 해 법무부 장관은 집단적 제재를 가한다는 명목으로 그리고 교도관들의 불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수감자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소포를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은 1971년 겨울부터 1972년 동안 감옥에서 일어난 시위의 불씨를 들쑤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32 번의 폭동이 있었고 그 중 몇몇은 감방을 파괴하고 옥상을 점거하기까지 진행되었다. 크리스마스 저녁, GIP는 파리의 라 상떼(La Santé) 감옥 앞에서 푸코와 들뢰즈도 참여한 시위를 조직했다.

 

   1971년 12월 내내, 폭력적인 대치 상황이 전개되었고, 특히 툴(Toul) 감옥의 구치소에서는 대치 끝에 수감자 중에 15 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GIP는 자기 외부에 “진실-정의 위원회”를 설립하고 도시에서의 활동을 개시했는데, 12월 16일 푸코는 기자 회견을 열어 정신과 의사 에디트 로즈(Édith Rose)의 보고서를 배부하였다. 이는 에디트 로즈가 직위에서 해임될 정도로 당국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로즈가 보고서에서 밝힌 것 중에는 독방에 갇힌 죄수가 며칠이나 감방 침대에 포박된 채로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있었다. 4월 27일 당시 들뢰즈는 소송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수감자를 대상으로 실행되는 수색이 수감자를 모욕하기 위한 시스템이라며 문제를 제기한 언론의 의도를 변호하는 증언을 했다.

 

   GIP에서 활동하는 지식인들은 종종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요청받았다. 폭동을 과격하게 진압한 끝에 200명의 폭도 중 여섯 명이 기소된 낭시(Nancy)가 바로 그런 지역이었다. 질 들뢰즈, 다니엘 드페르(Daniel Defert), 엘렌 식수(Hélène Cixous), 장 피에르 페이(Jean-Pierre Faye), 자크 동즐로(Jacques Donzelot)와 몇몇 사람들은 항의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여정을 떠났다. 푸코는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했는데, 지하철에서 곤봉 세례를 당하고 있던 이민자를 구해주기 위해 개입했다가 구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도시 중심가의 한 장소에서, 장 피에르 페이는 이 시위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밝힌 레스트 레퓌블리캉(L’Est républicain)의 기자와 담소를 나눈다. 페이는 그렇더라도 몇 분만 기다렸다가 다시 판단해보기를 권했다. 그 예언과도 같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경찰들이 그들을 덮쳤다. 들뢰즈는 발언을 위해 벤치에 올라갔지만 “윗사람이 자리를 비웠으니, 제가 대신 말하겠습니다.”라고 외친 후에 경찰에 의해 빠르게 제지되었다. 경찰의 제지는 호흡 곤란 장애가 있는 들뢰즈의 상태를 악화시켰고, 그는 반쯤 혼수상태가 되어 강제로 바닥에 쓰러지게 된다. 푸코의 친구인 젊은 자크 동즐로는 그의 곁에서 크게 걱정하며 그를 지켰다.

 

   1972년 1월 17일, 감옥에서의 탄압에 저항하기 위하여, GIP는 수많은 지식인을 동원하였고 한 시위에 사르트르와 푸코를 모이게 하는 데 성공한다. 거물급 인사들이 모인 이 소규모 그룹은 기자 회견이 열리는 파리 방돔 광장(place Vendôme)의 법무부 청사 내부로 침입한다는 목표에 전념했다.[각주:15] 이 모든 인사들은 푸코가 개시한 믈렁(Melun)의 수감자들의 선언에 대한 강의를 듣기 위해 청사 복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경찰은 “플르방(Pleven)을 감옥으로!” 혹은 “암살자 플르방!”라는 고함과 야유 속에서 조용히 개입했다. 끝내 헬멧을 쓰고 무장한 세 겹의 CRS(Compagnies républicaines de sécurité, 프랑스 국가 경찰)에 의해 보호받는 청사 바깥으로 몰려난 이들은, 해방 언론 행동(l’Agence de presse de Libération, APL) 사무실에서 기자 회견을 열게 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72년 1월 31일, 들뢰즈는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에 “수감자들이 우리에게 기대한 것...”[각주:16]이라고 쓴다. 그는 우편물 검열, [교도소의] 징계위원회, “독방”, 강제 노역(l’exploitation du travail, 노동 착취)과 가석방에서 수감자들의 정치적 권리 요구를 상기시키며, 수감자들의 표현 속에서 더 이상 “공적인 고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화된 비판”에 해당하는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본다.[각주:17] “구타당한 사람이나 다른 목격자에 의해 공식적으로 고발당하지 않는 한, 그 다음 날이든 한 달 후든 간에 교도관이 수감자를 구타할 수 없을 날이 다가오고 있다.”[각주:18] 이러한 시위들에서, 푸코는 친구 들뢰즈의 건강 상태에 대해 특히 주의를 기울이고 또 염려했다. 그래서 1972년 12월 16일 경찰 병력과의 대치 중에, 클로드 모리악은 경찰에게 체포된 후 푸코 그리고 한 소규모 그룹과 만나 들뢰즈를 찾기 위해 머리를 감싸쥐었다. “들뢰즈를 보셨군요... 그가 체포되지 않았길 바랍니다... 그처럼 미셸 푸코는 걱정했고, 매우 창백했다.”[각주:19]

 

“우리 모두는 파벌이다”

   감옥과 관련된 행동 외에도, GIP는 부당한 탄압과 인종 차별 사건에도 움직였다. 1971년 봄, 주베르(Jaubert) 사건이 터졌다. 누벨 옵세르바퇴르 기자인 알랭 주베르(Alain Jaubert)는 프랑스령 앤틸리스 제도(Antillais)에서의 시위 당시 발생한 경찰 폭력의 증인이었다. 그는 경찰 닭장차(panier à salade)에 실려 CRS에 의해 흠씬 두들겨 맞았다. 진상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71년 6월 21일 기자 회견을 열었다. 푸코는 클로드 모리악이 주재한 모임에서 이 위원회의 구성을 알렸다. 드니 랑글루아(Denis Langlois)의 발언이 있은 후, 들뢰즈는 “첫 번째 일군의 물음들은 5월 30일부터 경찰청에 의해 발표된 공식 성명들에서 비롯됩니다... 이 성명들이 아주 생뚱맞게 보이는 이유는, 신뢰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엔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협박입니다...”[각주:20] 또 다른 사건은 구뜨 도르(Goutte d’Or)에 있는 건물의 관리인에게 폭행 당한 알제리인 10대 소년 제랄리(Djellali) 사건이었다. 건물 관리인의 남편은 그 장면을 보았고, 그 사람 말로는 우발적으로 총을 쏴 알제리인을, 제랄리를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해당 지구에서 고조되는 중이었던 인종 간 긴장이라는 맥락이 폭로되었고, 이 1971년 가을의 인종주의적 범죄를 비난하는 시위들이 일어났다. 푸코는 조사 위원회 발의에 앞장섰고, 그 위원회에서는 장 주네(Jean Genet), 클로드 모리악, 장 클로드 파스롱(Jean-Claude Passeron), 그 중에서도 특히 들뢰즈를 찾아볼 수 있었다. 1971년 11월 27일에는, 사르트르와 푸코가 구뜨 도르에서 열린 대중 집회의 선두에 섰으며, 그들이 군중들에게 내보인 “구내 노동자들에게 호소함”이라고 적힌 벽보에는 들뢰즈, 푸코,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 이브 몽탕(Yves Montand), 장 주네, 사르트르,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가 서명했다.

 

   1971년과 1972년에 있었던 공동체의 이러한 투쟁적 개입은 들뢰즈와 푸코 사이에서 권력과 관련하여 지식인의 새로운 과제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방식에 대한 대화를 이끌어냈다. 이 대담 도중에 들뢰즈는 1972년 “우리는 모두 파벌들입니다.[각주:21]”라고 단언했다. 들뢰즈는 GIP에서 이론과 실천을 보다 구체적이고 국지적이며 부분적인 틀 안에서 배치함으로써 둘 사이의 관계를 일신할 역량을 지닌 새로운 조직 유형의 발현을 보았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론가 지식인은 주체이기를, 표상하고(représentante) 대표하는(représentative) 의식이기를 중단했습니다.”[각주:22] 푸코는 그 나름대로 대문자 진리 담론을 육화(incarnation)하는 것으로서 지식인의 보편적인 역할은 종언을 고했다고 간주하는데, 이는 사회의 민주화로 인해 각 사회적 범주들이 지식인을 필요로 하지 않고서도 그 자신들의 불만을 최선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식인에게 잔존한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그를 지식인임과 동시에 대상이자 수단으로 삼는 저 권력의 형식에 대항하는 투쟁에 집중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인은 실천적인 효능을 획득하기 위하여 계보학을 수행하고 물음을 던짐으로써 권력의 초점을 명확하게 구획 짓는 임무가 주어진다. 이 1971-72년은 두 친구가 이러한 정치적 실천의 대지에서 이례적으로 밀접했던 때였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론이라는 개념화의 측면과 실천이라는 실험의 측면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은 꽤나 달랐다. 실제로, 푸코는 생트-안느(Sainte-Anne) 병원에 있으면서 정신의학에 흥미를 가졌으며, GIP를 창설하고 나서 『감시와 처벌』을 쓰고 권력의 분석과 관련한 작업을 했다. 반면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러 개념과 기계들을 생산하고 사회적 현실에 그것들을 적용할 수 있을지 시험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가타리는 투쟁 활동과 제도적 정신 치료, 그리고 또 들뢰즈와 함께 고안해낸 개념들을 시험하는 장소로서 CERFI와 같은 여러 연구 조직과 연계된 일련의 사회적 실천들에 참가하고 있었기에, 들뢰즈/가타리 2인조는 매우 특출나고 풍부해질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푸코는 어떤 공구함을 제시하고자 했다. “저는 제 책들이 누군가가 그 안에서 자신의 분야에 적합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떤 공구를 찾기 위해 뒤적여볼 수 있는 일종의 도구 상자가 되길 바랍니다.”라고 푸코는 밝힌다.[각주:23]

 

국제적인 연대들

   이탈리아는 1977년, 후일 ‘납의 시대’[각주:24]로 불리게 될 정도로 매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조금 늦게야 격앙된 흥분으로 68년 5월을 체험했다. 여러 대학교에서 대규모의 자율주의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 운동은 종종 1975년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안티 오이디푸스』의 테제들에서 꽤나 커다란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극좌파 투쟁 활동가들은 점점더 심한 탄압에 시달리고 있었고,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연대를 요청했다. 이런 상황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신들의 연대를 표명하고자 했으며, 거기에 더해 이탈리아에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1977년 7월, 볼로냐의 《라디오 앨리스(Radio Alice)》[각주:25] 진행자 비포(Bifo)는 경찰에 의해 포위되자 파리로 망명하였으나, 범죄인 인도 협약에 따라 체포되어 인도될 위기에 처했다. 결국에는 정치적 난민으로 인정되어 프랑스에 받아들여짐으로써 인도되지 않은 비포는 가타리와 함께 이탈리아의 운동에 쏟아지는 탄압을 규탄하는 호소문을 작성했다. 이 호소문은 [이탈리아] 기독민주당 정권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공산당(PCI)의 역사적 타협의 정치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동시에 규탄했다. 이 호소문에는 질 들뢰즈, 미셸 푸코,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필리프 솔레르(Philippe Sollers), 쥘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등이 서명했으며, 그중에는 글에 서명하게 만들러 온 비포를 초대한 장 폴 사르트르도 있었다.

 

   더 나중인 1979년에는, 또 다른 극좌 투쟁 활동가로 이탈리아에서 체포된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Toni Negri)가 있었다. 당시 소송은 아직 개시되지 않았지만, 거의 네그리가 구속되자마자 들뢰즈는 그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1979년 5월 10일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에 실린 판사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각주:26]에서 네그리를 옹호했다. 그는 공소장에 어떤 확실한 것도 없이 누군가를 기소하고 감금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시했고 종교재판에서 진행되는 이단심문에 비유했는데, 이 비유는 훗날 카를로 긴츠부르그(Carlo Ginzburg)가 그의 친구 소프리(Sofri)의 재판 과정에서 되풀이된다. 들뢰즈는 이 문제에서 모든 민주주의자에게 관련되는 몇 가지 원리에 대해 기술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법은 어떤 동일성의 원리에 따랐어야 했다.”[각주:27] 그럼에도 네그리의 경우에, 검찰 당국은 기소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최소한의 확인 가능한 일관성도 갖추지 않았다. 두 번째로, 취조와 수사는 분리 혹은 배제의 원칙에 따라 최소한의 정합성에 의해 진행되어야 한다. 수감자는 어떤 장소에 있으면서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에도 있을 수는 없다…, 그 사건 당시, 검찰은 “모순되는 표현들을 첨가하면서 포함에 따라 진행한다.”[각주:28]고 들뢰즈는 쓴다. 세 번째로, 언론 또한 “…라고 말한다.”는 표현을 단순히 축적하면서 기사를 썼는데, 그 말들만 봤을 때 안토니오 네그리가 편재성이라는 특별한 재능을 지녀서 로마와 파리, 밀라노에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다고 볼 수도 있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들뢰즈는 이후에 볼로냐의 호소문과 관련하여 이탈리아 사람들이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쏟아낼, 그들과 관계도 없는 일에 참견한다는 식의 격렬한 비난에 미리 응답했다. “네그리는 이론가이며, 이탈리아에서 그런 만큼이나 프랑스에서도 중요한 지식인이다.”[각주:29] 얼마 후, 브루구아(Bourgois)에서 안토니오 네그리의 저작 『맑스 너머의 맑스』의 출간을 맞이하여, 질 들뢰즈는 『르 마탱 드 파리(Le Matin de Paris)』에 책 저자의 결백을 상기시키는 글을 썼다. 그는 모로(Moro) 사건에 연루된 정도를 밝혀내고자 네그리의 혐의를 조사하는 판사들에게 네그리의 저작을 읽어볼 것을 권고했다. 그에 따르면, 네그리의 저작은 “문자 그대로 결백의 증거이다.”[각주:30]

 

“추잡한 일”에 대한 힐난

   미디어의 번잡함과 떨어져 있고자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매우 완고했던 들뢰즈는, 모든 종류의 미디어 노출을 거부했고, 이 불가침 원칙을 어기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저작에 대한 긍정적인 구성을 지연시키는 모든 논쟁 형식을 싫어했지만, 그럼에도 1977년의 “신철학자들(nouveaux philosophes)”이라는 명제에 강렬하게 반대하기 위해 이러한 원칙에 딱 한 가지 예외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편집자이자 미뉘 출판사의 편집장인 제롬 랭동에게, 작은 소책자 형식으로 몇 장의 글을 써서 무료로 배포하고 모든 도서관에 배부하여 계산대 옆에서 손님들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권유하자고 제안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행동에 들어갔다. 제롬 랭동은 거기에 동의했고 모든 것은 비밀에 부쳐져야 했다. 하지만 몇몇 비밀이 누설되어 《르 몽드》에까지 흘러 들어갔고, 그 글은 1977년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생각들(Idées)》 면에 곧바로 게재되었다. 그동안 소책자는 잠시 서점에서 치워져 있었다. 1977년 6월 5일 쓰여진 들뢰즈의 글은 몇 가지 질문들에 대한 답변의 형식으로 쓰여졌다. 거기서, 들뢰즈는 날카롭게 이 얼치기 철학자들이 사유 그 자체에 퍼뜨리는 진정한 위험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 들뢰즈는 “당신은 ‘신철학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아무것도. 나는 그들의 사유가 형편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형편없음에는 두 가지 가능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그들은 커다란 개념들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속이 텅 빈 이빨들 만큼이나 거대한 개념들 말이지요. 대문자 법률(LA loi), 권력(LE pouvoir), 주인(LE maître), 세계(LE monde), 반항(LA rébellion), 신앙(LA foi) 등등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기괴한 혼합물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법률과 반항, 권력과 천사 같은 이분법도 그렇고요. 그와 동시에 사유의 내용이 무력해질수록, 사유하는 자가 점점 더 중요해집니다. 언표행위의 주체가 텅 빈 언표와의 관계를 통해 점점 더 중요성을 부여받는 것이지요.”[각주:31] 이 문제의 심각성은, 이 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고, 이런 유사-사유가 이분법적이고 사태를 단순화시키는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 정교한 개념들에 초점을 맞추는 모든 복잡화의 작업들을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다고 믿을 여지를 줌으로써 자신을 매혹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데에 있었다. 특히 가타리와 함께 시도 중인 작업에 대해서 들뢰즈는 “그들이 일을 망치고 있습니다.”라고 덧붙인다. 그러므로 일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시간이 되었고, 들뢰즈는 “신철학자들”이라는 현상에서 특별한 선발 순서, 역할들의 세심한 정돈들을 간파해낸다. “클라벨(Clavel) 안에는 마부제 박사가 있습니다. 복음주의적인 마부제 박사 말입니다. 잠베(Jambet), 라르드로(Lardreau)는 마부제의 두 조수 슈푀리(Spöri)와 페슈(Pesch)입니다.(그들은 니체의 “옷깃을 만지기”를 원합니다.) 브누아(Benoist). 그는 심부름꾼이고, 네스토르(Nestor), 레비(Lévy). 그들은 어떤 때는 흥행을 바라는 공연기획자들이고, 어떤 때는 스트립 걸이며, 바람잡이이고, DJ입니다...”[각주:32]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이 현상의 참신성이 철학의 영역에 마케팅 원리를 도입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했다. 이 새로운 그룹의 승리할 수 있었던 기반에 대해, 들뢰즈는 먼저 두 가지 주된 이유를 제시한다. 한편으로, 저널리즘과 지적 창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전복이 있다. 이는 더 이상 사유를 펼쳐낼, ‘순간의 사유’를 위한 시간을 남겨놓지 않으면서 사건을 만들어내고 관계의 전복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저널리즘적 행위이다. 두 번째로, 이 곡예사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68에 대한 반감이다. “누가 가장 68년 5월을 혐오하는지를 앞다투어 말하고자 하지요... 68에 대한 적개심, 그들이 팔 것이라곤 그것 뿐입니다.”[각주:33] 실제로 68년 5월의 10주년 기념일이 다가오는 1977년, “신철학”이 최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이 세대에 속하는 대다수는 희망을 혁명적 절단의 실패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실망스러운 유산을 즐기고 있었다. 죽음의 문화와 동반하고 있는 이 “신철학자”들에 대한 거부에서 들뢰즈는 깊은 통감을 표명한다. “저를 역겹게 만드는 건 아주 단순합니다. 신철학자들은 순교자, 굴라그, 역사의 희생양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체를 먹고 살아가지요... 그 희생양들은 그들의 이름으로 울고, 그들의 이름으로 생각하며 또 그들의 이름으로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에게 그럴 여지를 주기 위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이나 원통함, 병적인 자만심이 아닌 삶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저항하는 자들은 차라리 위대한 생존자들입니다.”[각주:34] 이는 들뢰즈가 수 세기 동안 이어진 사유의 노력을 타도해버릴 우려가 있는 치명적인 위협에 맞서 우리를 초대하는 삶을 위한 찬가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약간의 숨을 지켜내고자 하는데 모든 노력을 쏟은데 반하여, 신철학자들은 “약간의 공기마저 사라져버린 숨 막히는 방, 질식시키는 방을 재구성했다. 이는 모든 정치적인 것과 모든 실험에 대한 부정이다. 요컨대, 내가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그들이 하는 추잡한 일이다.”[각주:35] 철학자의 활동이 미디어화되는 것에 반대한 것과 그 위험성에 대한 경고는 매우 올바른 것으로 드러났을 뿐 아니라, 신철학자들은 그 당시 여전히 어떤 희망으로 제시되어 온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의 붕괴를 확인해낸다는 장점이 있었음에 반해 전체주의적 체제들을 덮어놓고 포장했음을 덧붙이는 것이 좋겠다.

 

팔레스타인 대의 : 유목 민족의 예시

   팔레스타인 대의를 지지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참여의 기저에는 탈영토화된 땅 없는 민중에 대한 감수성이 있다. 1977년에서 78년, 일란 하레비는 뱅센느에서 이스라엘에 의한 아랍 영토의 탈취에 대한 세미나를 조직하였고, 가타리는 열정과 끈기를 가지고 세미나를 따라갔다. 이 논의들을 위하여 알레비와 알고 있던 그리고 가타리도 조금 알고 있었던 팔레스타인 지식인 엘리아스 산바르 또한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그는 발언을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불꽃튀는 논쟁 속에서 1930년대 팔레스타인 지하운동단체의 전쟁 기술에 대한 긴 발표를 즉흥적으로 하게 되었다. 1978년 그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을 준비 중이었고, 전쟁 기계와 포획 장치…, 에 대해 고심하면서 특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경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가타리는 뱅센느에서 유목적 전쟁 기술들과 유목론(nomadologie)에 대한 들뢰즈의 설명을 듣고 나서 들뢰즈와 산바르를 연결시켰고, 두 사람의 만남은 말년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우정을 낳았다. 《르 몽드》지 칼럼[각주:36]으로 게재된, 까다롭고 험난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 대한 들뢰즈의 첫 공적인 개입은 그들의 첫 교류의 결과이다. 이러한 개입은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남부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여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와 레바논 주민 거주지에서 수백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고 베이루트를 향한 레바논 사람 수십에서 수천 명의 피난을 유발한 직후에 일어났다. 들뢰즈는 “국가도 땅도 없는 사람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모든 이들의 골칫거리들이다.”[각주:37]라고 말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편을 들어준다. 이 기고문에서, 들뢰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죽음을 전망으로 제시할 뿐인 공갈협박들을 고발하고, “그들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는 전쟁 상태에 처해 있는 이상”[각주:38]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유효한 교섭상대로 인정할 것을 국제사회에 촉구했다.

 

   1980년, 엘리아스 산바르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성찰하는 학술지의 창간을 기획한다. 그는 여러 군데에 접촉하고 이미 잘 짜여진 그의 기획을 보여주었지만 그 시도는 매번 좌절되었고, 산바르는 들뢰즈에게 연락하여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묻는다. 들뢰즈는 그에게 제롬 랭동[각주:39]을 소개시켜 주리라고 답변한다. 그에 따라 들뢰즈를 통해 랭동의 추천을 얻은 엘리아스 산바르는 그가 알지 못했던 미뉘(Minuit) 출판사와 만나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Études palestiniennes)》지가 1981년 10월 탄생했다. 얼마 후에, 엘리아스 산바르와 들뢰즈는 그들이 〈팔레스타인의 인디언들(Les Indiens de Palestine)〉[각주:40]이라 제목을 붙이기로 합의한 긴 대담을 출간하기로 결정한다. 또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1980년대 초 계속해서 점점 더 극적이 되어가던 전투들로 인해 갈등이 장기화되던 당시, 들뢰즈는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에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대의는 무엇보다도 그 민중들이 겪어왔고 또 쉼 없이 겪고 있는 총체적인 불의함들에 앞선다.”[각주:41]며 팔레스타인 대의를 상찬하는 글을 쓴다. 아라파트는 사브라-샤탈리 학살을 마주하고 “수치”를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들뢰즈는 나치에 의해 저질러진 역사적인 최대의 집단 학살(génocide)을 탈역사화된 종교적 시각으로 절대 악으로 변환하는 것을 비판한다. “이는 역사적인 시각이 아니다. 이는 악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악을 전파하며, 다른 무고한 이들에게 그 악을 돌린다.”[각주:42] 여기에서 들뢰즈는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한 그의 거부를 급진적으로 표현한다. 이스라엘의 방침과 이스라엘의 정책을 완곡하게 옹호하는 국제적인 공모에 저항하기 위해, 들뢰즈는 “서구식으로 말하자면 거의 셰익스피어에서 튀어나온 듯한 역사적인 위인, 바로 아라파트”[각주:43]를 인정할 필요가 있었다고 여긴다. 2004년 『팔레스타인 사람의 형상들』을 출간하면서 “질 들뢰즈, 흠결없는 우정에 경의를 표하며”[각주:44]라는 말로 책을 헌정한 엘리아스 산바르에게,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작은 본질적인 자원이다. 이러한 헌정이 증언하는 바는 산바르가 그의 편에 선 들뢰즈의 참여라는 면에 신세를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서 개진된 수많은 조작적 개념들에 대해 지적으로도 신세를 지고 있다는 인식이다. 돌이켜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 들뢰즈가 식민주의적 현상으로 전혀 환원될 수 없는 그리고 아주 명백히 나치즘에 의해 저질러진 집단 학살(génocide)와 상호연관되어 있는 시온주의 현상의 특수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더구나 이스라엘 민족의 본성에 대한 이런 맹목은, 이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의 친구인 미셸 푸코와 결별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경우를 넘어서, 전쟁 기계라는 개념은 현대 사회에서 관료주의와 예속화의 전달자인 국가 기구의 형성에 맞서는 푸닥거리에 관해 자문하는 기능을 한다. 이 개념은 일시적인 존재 양태를 가질 뿐인, 환자들을 치료함과 더불어 제도 자체를 임상 치료의 대상으로 삼음을 의미하는 제도적 심리치료 방식을 따라 쉬지 않고 계속해서 묻는 집단들의 삶에 관한 성찰의 중심에 있다, 또한 배반당하고 탈취당한 혁명들에서 사회적 변화의 모든 시도들이 고사하는 것을 피하려는 구상들도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전쟁기계가 외부성이라는 상황에서 확대된다는 사실은 그러한 위험들을 피하기 위한 실효적인 견제를 존재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다. 분자적인 미시-연결망들을 위해 공식적이고 몰적인 제도들이 존재 이유를 잃도록 하기 위하여 전쟁 기계를 증식케 하고 한없이 배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민족지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여러 관찰과 분석을 포함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명제들을 한층 공고하게 만든다.[각주:45] 클라스트르는 실제로 국가는 생산력의 발전한 결과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정치 세력이 분화한 결과 존재하게 되는 것도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진화론의 도식을 전복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전쟁 기계는 유목주의, 그것의 전이 그리고 잠재적인 속도와, 제약 없이 움직일 수 있는 홈이 패여 있지도 않고 어떤 좌표축도 없는 표면과 불가분하게 엮여있다.

 

   마지막으로, 이라크에 맞선 전쟁[각주:46]은 들뢰즈의 급진적인 지탄의 대상일 것이다. 들뢰즈는 파리 8대학 동료인 르네 셰레와 함께 〈야비한 전쟁(La guerre immonde)〉[각주:47]라는 특히 짧은 글을 쓴다. 그들은 “그들의 무기를 시험하는 국가라는 이름의 테러리즘 조직”[각주:48]으로 나타나는 펜타곤이 쿠웨이트의 해방이라는 핑계로 이라크 민족과 이라크 국가를 파괴하는 행위를 규탄했고, 프랑스 정부가 거기에 그저 동조하고 있을 뿐이라며 책임을 묻는다. “우리 정부는 끊임없이 자신들이 했던 선언들을 부인하며, 반대할 권한이 있었던 전쟁에 점점 더 깊이 끌려들어가고 있다. (미국 대통령) 부시는 마치 하인을 칭찬하듯이 우리를 칭찬하고 있다.”[각주:49]

  1. 《시테(Cités)》, No. 40, Paris, PUF, 2009 [본문으로]
  2.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phie?)』 , 파리, Éd. de Minuit, 1991, p. 102. [옮긴이] 국문 번역은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정임, 윤정임 옮김, 현대미학사, 1995, p.156-157을 참조하였다. [본문으로]
  3. 같은 책, p. 102., 국역본 p.157. [본문으로]
  4. 같은 책, p. 103., 국역본 p.158-159. [본문으로]
  5. 「질 들뢰즈와 디오니스 마스콜로의 서신」, 《린(Lignes)》, No. 33, 1998년 3월, p.222-226., 질 들뢰즈, 『광기의 두 체제(Deux Régimes de fous)』, 파리, 미뉘(Minuit), 2003, p.305-310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6. 디오니스 마스콜로, 『기억하려는 노력의 둘레에서(Autour d’un effort de mémoire)』, M. Nadeau, 1987, p.20. [본문으로]
  7. 디오니스 마스콜로, 질 들뢰즈에게 보낸 편지, 1988년 4월 30일, 『광기의 두 체제(Deux Régimes de fous)』, 앞의 인용, p.306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8. 질 들뢰즈, 디오니스 마스콜로에게 보낸 편지, 1988년 8월 6일, 같은 책, p.307. [본문으로]
  9.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앞의 인용, p.104., 국역본 p.160. [본문으로]
  10. 같은 책, p.104., 국역본 p.159. [본문으로]
  11. 같은 책, p.106., 국역본 p.163. [본문으로]
  12. 지네트 콜롬벨, 「들뢰즈-사르트르 : 발자취들(Deleuze-Sartre : pistes)」, 앙드레 베르놀 & 리차드 핀하스 편저(André Bernold et Richard Pinhas), 『흩어져 있는 들뢰즈(Deleuze épars)』, 파리, 에르만(Hermann), 2005, p.43. [본문으로]
  13. 펠릭스 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대담〉, 《L’Arc》, No.49, 1972, 질 들뢰즈, 『대담(Pourparlers)』, 파리, 미뉘(Minuit), 1990, p.26에서 재인용. [옮긴이] 국문 번역은 질 들뢰즈, 『대담』, 신지영 옮김, 갈무리, 2023, p.37을 참조하였다. [본문으로]
  14. 질 들뢰즈, 1986년 1월 28일 강의, 파리 8대학, 프랑스 국립 도서관(BnF, The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음성 아카이브 [본문으로]
  15. 여기에는 특히 들뢰즈 부부, 클로드 모리악(Claude Mauriac), 장 폴 사르트르, 미셸 비앙(Michel Vian), 장 셰스노(Jean Chesneaux), 미셸 푸코, 다니엘 드페르, 앙드레 글뤽스만(André Glucksmann), 르네 셰레(René Schérer), 실비 마리옹(Sylvie Marion), 장 피에르 페이, 제롬 페뇨(Jérôme Peignot), 마리안느 메를로 퐁티(Marianne Merleau-Ponty), 모니크 앙트완(Monique Antoine), 자크 알랭 밀러(Jacques-Alain Miller), 프랑수아 레뇨(François Régnault), 도미니크 데상티(Dominique Desanti), 장 피에르 밤베르제(Jean-Pierre Bamberger), 이브 아르디(Yves Hardy), 크리스티앙 데샴프스(Christian Descamps), 사진사 엘리 카강(Élie Kagan) 등이 있다. [본문으로]
  16. 질 들뢰즈,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 1972년 1월 31일. [본문으로]
  17. 같은 글, 『무인도와 다른 글들(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 파리, 미뉘(Minuit), 2002, p.286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8. 같은 글, p.287. [본문으로]
  19. 클로드 모리악, 『모리악과 아들들(Mauriac et Fils)』, 파리, 그라세(Grasset), 1986, p.388. [본문으로]
  20. 질 들뢰즈, 파리 8대학 아카이브, BDIC(Bibliothèque de documentation internationale contemporaine) [본문으로]
  21. 질 들뢰즈, 〈지식인들과 권력〉, 《라르크(L’Arc)》, No.49, 1972년 3월 4일, 『무인도와 다른 글들(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 파리, 미뉘(Minuit), 2002, p.289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22. 같은 글. [본문으로]
  23. 미셸 푸코, 〈권력의 메커니즘에서 감옥과 수용 시설〉. 마르코 데라모(M. D’Eramo)와의 대담, 《아방티(Avanti)》, No. 53, 1974 3월 3일. 『말과 글(Dits et Écrits)』, t. 2, p.523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24. [옮긴이] 납의 시대(Anni di piombo)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테러로 점철된 엄혹한 시절에 대해 이탈리아 역사학계가 붙인 용어로, 이탈리아의 사회정치적 혼란기를 뜻한다. 이 시기에는 이탈리아 내의 정치적 담론이 극단화 되고 무장 충돌과 정치적 테러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본문으로]
  25. [옮긴이] 라디오 앨리스(Radio Alice, Alice는 미국에서 라디오 방송국을 칭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는 일종의 예술 실험으로서 생겨난 이탈리아의 무료 라디오 방송 채널로,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Franco "Bifo" Berardi)에 의해 1970년대 말 창립되었다. 이 채널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과 다다이즘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이탈리의 반문화 운동 및 자율주의 운동에 동조하였다. [본문으로]
  26. 질 들뢰즈, 〈네그리의 판사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Lettera aperta ai guidieri di Negri)〉, 《라 레푸블리카(La Repubblica)》, 1979년 5월 10일. 질 들뢰즈, 『광기의 두 체제(Deux régines de fous)』, 파리, 미뉘(Minuit), 2003, p.115-159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27. 같은 글, p.156 [본문으로]
  28. 같은 글, p.157. [본문으로]
  29. 같은 글, p.158. [본문으로]
  30. 질 들뢰즈, 《르 마탱 드 파리(Le Matin de Paris)》, 1979년 12월 12일, 질 들뢰즈, 『광기의 두 체제(Deux régines de fous)』, 같은 글, p.161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1. 질 들뢰즈 〈신철학자들과 더 일반적인 문제들에 관하여(À propos des nouveaux philosophes et d’un problème plus général)〉, 쉬플레망 드 미뉘(Supplément de Minuit), No. 24, 1977년 5월, 『광기의 두 체제(Deux Régimes de fous)』, 앞의 인용, 2003, p.127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2. 『광기의 두 체제(Deux Régimes de fous)』, 앞의 인용, p.129. [본문으로]
  33. 같은 책, p.131. [본문으로]
  34. 같은 책, p.132. [본문으로]
  35. 같은 책, p.133. [본문으로]
  36. 질 들뢰즈, 〈골칫거리들(Les gêneurs)〉, 《르 몽드(Le Monde)》, 1978년 4월 7일. [본문으로]
  37. 같은 글, 『광기의 두 체제(Deux Régimes de fous)』, 앞의 인용, 2003, p.147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8. 같은 글, p.149. [본문으로]
  39. [옮긴이] 제롬 랭동은 프랑스의 출판사 Minuit의 대표이다. [본문으로]
  40. 질 들뢰즈, 〈팔레스타인의 인디언들(Les Indiens de Palestine)〉, 엘리아스 산바르와의 대담, 《리베라시옹(Libération)》, 1982. 5. 8.-9., 『광기의 두 체제(Deux Régimes de fous)』, 앞의 인용, 2003, p.179-184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41. 질 들뢰즈, 〈야세르 아라파트의 위대함(Grandeur de Yasser Arafat)〉, (1983년 9월 작성),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Études palestiniennes)》, No. 10, 1984년 겨울호, 『광기의 두 체제(Deux Régimes de fous)』, 앞의 인용, 2003, p.221-225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42. 같은 글. [본문으로]
  43. 같은 글, p.223. [본문으로]
  44. 엘리아스 산바르, 『팔레스타인 사람의 형상들 : 기원들의 정체성, 생성의 정체성(Figures du Palestinien. Identité des origines, identité de devenir)』, 파리, 갈리마르(Gallimard), 2004. [본문으로]
  45.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파리, 미뉘(Minuit), 1974. [본문으로]
  46. [옮긴이] 1991년 1월 17일부터 2월 28일까지 미국 주도의 다국적 연합군이 이라크를 상대로 수행한 걸프(Gulf) 전쟁을 말한다. [본문으로]
  47. 질 들뢰즈, 르네 셰레, 〈야비한 전쟁(La geurre immonde)〉, 《리베라시옹(Libération)》, 1991년 3월 4일. [본문으로]
  48. 같은 글, 『광기의 두 체제(Deux Régimes de fous)』, 앞의 인용, 2003, p.351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49. 같은 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