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기 전에
(1) 이 글은 프랑스어로 출간되는 학술지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에 수록된 팔레스타인 저술가 엘리아스 산바르(Elias Sanbar)와의 대담을 기록한 것이다. 1980년, 엘리아스 산바르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는 학술지를 창간하고자 하였는데, 이미 기획안이 완성된 상태로 여러 군데 접촉했음에도 산바르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기 일쑤였다. 산바르는 벵센느에서의 세미나 이후 절친한 친구가 된 들뢰즈에게 연락을 취해 도움을 요청했고, 들뢰즈는 산바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출판사 미뉘(Minuit)의 대표 제롬 랭동(jérôme lindon)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렇게 하여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가 1981년 10월 창간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산바르와 들뢰즈는 함께 이 대담을 출간하게 된다. 1
(2)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들뢰즈는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과 그에 수반하는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강탈과 식민화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여러 편의 글과 인터뷰를 남겼다. (1978년과 1982년, 1983년, 1988년) 1983년에는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지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식민화 과정을 현재진행형인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식민화와 관련짓는 글을 기고하는데, 팔레스타인에 관한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일련의 글들에서 들뢰즈는 북아메리카와 팔레스타인에서 나타난 식민적 폭력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관련됨을 분석하며, 팔레스타인을 식민화하며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그 역사를 삭제하는 이스라엘의 행위가 ‘집단 학살(genocide)’라는 점을 강조한다. 2
(3) 엘리아스 산바르는 1947년 이스라엘의 하이파에서 태어난 팔레스타인 역사학자이자 시인, 에세이스트, 번역가, 저널리스트이자 외교관으로, 70년대 후반부터 들뢰즈와 활발하게 교류했다. 산바르는 1960년대 후반부터 파리에서 설립된 팔레스타인 학생 총연합의 프랑스 지부 회원으로 활동했는데, 1969년 연합에서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와 팔레스타인 투사들과의 만남을 위한 요르단과 레바논 방문을 조직했을 때 산바르는 방문 기간 내내 고다르와 동행했다. 1981년 팔레스타인에 관한 가장 권위있는 학술지로 평가받는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지를 공동으로 창간하여 25년간 편집장으로 재직하였다. 산바르는 팔레스타인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서구 세계에 팔레스타인의 문화를 알리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스테판 에셀과의 공저 《생존자와 추방자(Le rescapé et l’exilé)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2012년 이후 산바르는 유네스코 팔레스타인 대사 겸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5년에는 저서 《팔레스타인 사람들(The Palestinians)》로 팔레스타인 도서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여러 매체에서 활발하게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인디언들 (LES INDIENS DE PALESTINE)
프랑스어로 쓰인 아랍 학술지를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 왔다. 사실은 팔레스타인보다도 북아프리카 쪽에서 오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 연구지는 명백히 팔레스타인 문제에 중심을 맞추면서도, 아랍 세계 전체와도 관련되는 두 가지 성격을 갖는다. 하나는 이 연구지가 매우 심도 있는 사회-정치적 분석을 능숙한 논조로 냉철하게 제시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매우 풍부하면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랍 그대로의 문학, 역사학, 사회학 ‘문헌집(corpus)’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질 들뢰즈 – 팔레스타인에서 무언가가 무르익은 것 같습니다. 마치 그 사람들이 자신들이 맞은 위기의 처음 상태를 극복해낸 것처럼, 마치 안정적인 영역 혹은 평온한 영역, 당연히 가졌어야 할 어떤 영역에 도달한 것처럼 새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와 새로운 양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공격적이지도 그렇다고 방어적이지도 않으면서 다만 세계 전체와 ‘동등한 위치에서’ 말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새로운 방식의 말하기지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직 그들의 목표에 다다른 것은 아닌 듯한데, 이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엘리아스 산바르 – 첫 호가 발행되자마자 우리는 그런 반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니,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이런 학술지를 낼 수 있다니!”라고 스스로에게 말한 당사자들도 있고요. 그건 그들의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있던 어떤 이미지를 동요하게 만들었죠. 많은 이들에게서 우리가 강하게 요청하는 팔레스타인 투사의 이미지가 여전히 추상적인 것으로 남아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설명하자면, 우리의 실존이라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전까지 우리는 난민들로 인식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의 저항 운동이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투쟁에 집중하게 했을 때, 우리는 또다시 어떤 환원적인 이미지 안에 갇혀버렸지요.
순전히 군사적인 이미지가 한도 끝도 없이 되풀이되고 또 고립되었고, 우리는 단지 그런 사람들로만 받아들여질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이미지로 좁은 의미의 군대보다는 투사를 더 선호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학술지의 출간이 유발한 놀라움 또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존재하고 있으며 단지 추상적인 원리원칙을 상기시키기 위한 용도로 취급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말하기를 누군가는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학술지가 팔레스타인에서 만들어지긴 했지만, 이 학술지는 다양한 관심사들이 표현되는 터전을 이루어내고 그에 못지않게 팔레스타인인뿐만 아니라 아랍인, 유럽인, 유대인과 같은 여러 사람들이 발언하는 장소를 구성해냅니다.
누군가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작업에 지평의 다양성이 있다는 것, 앞서 말한 것뿐만 아니라 여러 계층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해야 합니다. 팔레스타인 화가들, 조각가들, 노동자들, 농민들, 소설가들, 은행원들, 배우들, 상인들, 선생들... 요컨대 실제 사회 그리고 이 학술지가 보고하고 있는 실존들에 대해서요.
팔레스타인은 단지 하나의 민족일 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땅이기도 합니다. 팔레스타인은 이 민족과 그들이 강탈당한 대지 사이의 연결이고, 그 부재와 귀환을 향한 커다란 욕망이 작용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1948년 이래로 살고 있던 우리 민족을 전부 추방함으로써 만들어진 유일한 장소입니다. 우리가 팔레스타인을 두 눈에 담을 때, 우리는 연구하고, 조사하고, 아주 작은 움직임들을 포착하고, 그곳에 가해지는 모든 변화를 기록하고 또 옛 팔레스타인의 모든 이미지를 완성해나가지요. 요컨대 우리는 바라보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질 들뢰즈 - 《팔레스타인 연구》지에 실린 수많은 논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들의 영토에서 내몰렸던 과정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불러내고 또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식민화된 사람들하고는 다른 상황에, 피난하고 내몰리는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준비 중인 책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인) “홍인(Peau-Rouges)”과의 비교에 역점을 두었는데 3, 이는 자본주의 안에 두 가지 매우 다른 움직임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때로는 사람들을 그들의 영토에 가두어놓고서 잉여가치 축적을 위해 노역을 시키고 착취하는 것이 문제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식민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때로는 급격한 발전을 위해 다른 곳에서 노동력을 불러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한 영토에서 거기 사는 사람들을 치워버리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아메리카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 시오니즘의 역사가 바로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 왔지요. 어떻게 진공 상태를 만들 것인가, 어떻게 사람들을 치워버릴 것인가?
한 대담에서, 야세르 아라파트 4는 그러한 비교의 한계를 지적하고, 5 그러한 한계가 《팔레스타인 연구》지의 지평선을 형성하고도 있다고도 지적합니다. “홍인들”은 그들이 추방된 영토 바깥에 어떤 기반이나 세력도 전혀 놓여 있지 않았던 반면에, 팔레스타인에는 아랍 세계가 있었다고 말이지요.
엘리아스 산바르 – 낯선 땅들로 이주당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집”의 연장선상으로 이주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독특한 추방자들입니다. 우리가 이주한 아랍 땅은 우리가 자기네들과 융화되길 원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인 곳이지요. 참,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랍인들을 향해 이스라엘의 언어에서는 ‘보이지 않게 하다’를 의미하는 “동화”를 우리와 해내지 못했다고 비난한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생각하게 되네요. 우리를 추방한 사람들이 느닷없이 아랍의 인종주의라고 주장하는 어떤 것에 대해 우리의 관점에서 걱정하게 된 거죠. 그렇다고 그게 우리가 몇몇 아랍 국가들에서 반발에 맞설 필요가 없었다는 걸 의미하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그러한 충돌들은 우리가 아랍 사람이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무장 투쟁을 통한 혁명을 하고 또 해왔기 때문에 가끔 그것이 불가피했을 뿐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우리는 유대 식민지 개척자의 “홍인들”과도 같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우리의 유일한 역할은 사라져버리는 데에 있지요.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는 아메리카에 미국을 탄생케 한 그 과정의 재연임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거기에 그들의 상호 연대를 이해하기 위한 본질적인 요소 중 하나가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전적’이고 통상적인 식민화를 위한 위임통치 시기 동안 식민자들과 피식민자들이 공동으로 생활하지 않도록 만든 그런 요소들이 있지요. 6 프랑스와 영국 등은 토착민들이 그 안에 현존하는 것이 그 공간의 존재 이유가 되는 어떤 공간을 설치하기를 강력하게 바랐습니다. 거기에 있는 피지배자들에게 지배력이 미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지요. 이는, 우리가 그걸 바랐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어떤 코뮌적인 공간을 창조해냈습니다. 다시 말해, 명백하게도 식민자와 피식민자 사이의 이러한 ‘만남’을 이루어내는 어떤 네트워크, 구역, 사회적 삶의 수준을 창조해낸 것이지요. 그 만남이 무관용적이고, 짓밟으며, 착취하고 또 강압적이라 해도 ‘이방인’이 ‘현지인’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과 ‘접촉’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은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시오니즘은 그와 반대로 우리의 부재를 필요로 함으로써 시작하며, 더 나아가 일란 할레비가 잘 서술했듯이 7 그 구성원들의 특수성(유대인 공동체들의 옛 소유지)을 우리의 거부와 우리의 퇴거, ‘강제 이주’ 그리고 대체의 주춧돌로 삼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렇게, 내가 ‘이방의 식민자들’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도착했던 것과 같은 발자취를 따라, ‘미지의 식민자들’이라고 불러야만 할 것 같은 이들이 우리에게 태어났습니다. 그들의 고유한 특성을 타자에 대한 전적인 거부의 기초로 삼고 그에 따라 모든 걸 사고하고 행동하는 이들이요.
더구나 1948년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나라는 단지 점령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소멸했지요. 같은 순간에 ‘이스라엘 사람’이 된 유대인 식민자들은 그것을 실천해야만 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오니즘 운동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어느날 떠나갈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그 나라가 텅 비어있었다는 생각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공동체를 불러모았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 도착해서 그 반대 상황을 확인하고 그것을 글로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 공동체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매일매일 물리적으로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의 면전에 대고 그들이 거기 없는 사람인 양 행동했지요. 이런 자기기만이 물리적인 것도 아니니 거기에 곧이곧대로 속아넘어가는 이는 없었습니다만, 모두가 이 사람들이 오늘날 현재 ‘막 소멸하려는 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멸이 성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출발점에서부터 마치 그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처럼, 다시 말해 엄연한 현실에서도 타자의 현존을 전혀 ‘보지 않는’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 또한 깨닫고 있지요. 그 성공을 위해서 땅을 텅 비우는 일은 식민자들 자기 자신의 머리에서 ‘타자’를 퇴거조치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했습니다.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시오니즘 운동은 유대주의를 추방의 근거 그 자체이자 다른 이들에 대한 거부의 근거로 만드는 인종주의적 시각을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다른 인종주의자들이 주도한 유럽에서의 박해에서 결정적으로 도움을 얻은 시오니즘 운동은 그로 인해 그 자신의 방식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지요.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시오니즘이 대문자 유대인을 유폐했다고, 내가 방금 서술한 그런 시각의 포로로 붙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시오니즘은 그들을 포로로 붙잡고 있습니다. 어느 한순간에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요.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홀로코스트가 지나가자 그 방식들이 진화하여, 유대인들이 어디에서나 그리고 어느 때에나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들의 ‘타자’이기를 원하는 사이비 ‘영원한 원리’ 안에서 스스로를 변이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거부당하고 저주받는 ‘타자’라는 그러한 위치를 고집스럽게 점유하기만을 갈망할 수 있는 민족이나 공동체는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중동의 타자들은 아랍 사람이고 팔레스타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들의 소멸이 의제화되는 그 타자에게 서구열강들이 어떤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은 그야말로 냉소와 위선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부 수장의 광기에 대항하여 보호를 보장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건 바로 우리입니다.
이 모든 상황을 무릅쓰고, 우리의 유일하고 단일한 대변자인 OLP(l'Organisation de Libération de la Palestine,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팔레스타인 민주국가를, 그들이 누구이건 간에 그들의 모든 거주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이 무너지는 어떤 국가를 갈등의 해결책으로 제시했습니다.
질 들뢰즈 - 《팔레스타인 연구》지는 1호의 첫 두 페이지에 수록된 그 자신의 선언문이 있지요.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은 민족”이라고요. 이는 다양한 의미를 담은 외침입니다. 첫 번째로, 부름이며 소환입니다.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인정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쉬지 않고 비난합니다. 보세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를 파괴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팔레스타인이 자기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싸워온 기간이 50년도 넘었습니다.
두 번째는, 어떤 반대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선언은 차라리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은 민족이 아니다”는 것이었죠. 우리의 초월성과 어마무시한 학대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지 2호에 실린 유대인 저자들의 두 텍스트가 중요해요. 홀로코스트에 관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시오니즘적 반응에 관한, 그리고 팔레스타인과의 관계와 거기에 발을 담그지 않았던 아랍 세계 전체와의 관계에서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사건을 이해하려는 의미작용에 관한 텍스트들이요. “규범에서 벗어난 민족으로 대우받기”를 요구하는 이스라엘 국가는 서방 국가와의 관계자에게 경제적으로 재정적으로 의존하는 상황 아래에서 더욱 더 유지될 것인데, 그와 같은 어떤 나라에서도 그와 비길 만한 경우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보아즈 에브론) 8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와 반대되는 요구 사항에, 그들 자신인 자가 되는 다시 말해 완전히 “평범한” 민족이 되는 것에 그토록 사로잡혀있는 것이지요.
종말론적 역사관에 대항하여, 역사의 의미를 가능한 것 중 하나로, 가능성의 다양체 그리고 매 순간 증식하는 가능성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 《연구》지가 현실적인 분석들로 무엇보다도 보여주길 원하는 게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엘리아스 산바르 – 완전히요. 우리의 현존을 세계 안으로 다시 불러들이는 이러한 물음은, 그렇게나 간단한 것이면서도, 분명히 많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진정으로 받아들여지기만 한다면 팔레스타인 민족의 소멸을 예견했던 사람들에게 매우 힘든 과업을 부과하게 될 그런 종류의 진실입니다. 실제로, 결국, 그러한 진리가 말하는 바는 모든 이들이 말하자면 “권리에의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지요. 당연해 보이지만, 모든 정치적 투쟁의 출발지이자 종착지를 얼마간 표시하는 힘입니다. 시온주의자들한테 물어보면, 그들이 이 주제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요? 당신은 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어떤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하는 건 절대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떠한 세력도 그런 입장을 지지할 수 없고, 그들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지요. 틀림없이 그와 반대로 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거기에 없다”고 단언하는 걸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현존에 대한 우리의 긍정은, 그것이 말해지지 않기 때문에, 언뜻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 François Dosse, 〈Les engagements politiques de Gilles Deleuze〉,《Cités》 40, Paris, PUF, 2009 [본문으로]
- Kathryn Medien, 〈Palestine in Deleuze〉, 《Theory, Culture & Society》, 1 September 2019, 36(5):49-70 [본문으로]
- 들뢰즈는 다음을 언급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1948, 추방(Palestine 1948, l’expulsion)』, 파리, 1983년 발간된 팔레스타인 연구지 출판본. [본문으로]
- [옮긴이]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1929~2004)는 팔레스타인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정부 수반(1994~2004),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의장(1989~2004)이다. [본문으로]
-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 no.2, 1982년 여름, p.3-17. [본문으로]
- 1921년까지 이어진 영국의 군부 통치를 받던 팔레스타인은 국제 연맹(SDN, Société des Nations)에 의해 대영제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다. 민간통치는 1923년 시작되어 1948년 5월 15일 영국이 물러나고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는 날까지 지속되었다. [본문으로]
- 일란 하레비(Ilan Halevi), 『유대인 문제, 종족집단, 법률, 공간(Question juive, la tribu. la loi, l’espace)』, 파리, 미뉘(Editions de Minuit), 1981. [본문으로]
- 보아즈 에브론(Boaz Evron, בועז עברון) 『“홀로코스트”에 대한 해석들 : 유대 민족을 향한 위험(Les interprétations de l’“Holocauste” : Un danger pour le peuple juif)』, 팔레스타인 연구, no.2, 1982 겨울, p.36-5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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