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번역

Gilles Deleuze, 〈GRANDEUR DE YASSER ARAFAT〉(1983)

Galpie 2024. 10. 22. 22:14

* 들어가기 전에

(1) 이 글은 들뢰즈가 1983년 작성하고 1984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지에 발표한 글로, 1980년대 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이 여러 전투들로 고조되면서 갈등이 영속화될 조짐이 보일 당시 발표되었다. 여기서 들뢰즈는 팔레스타인 정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에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대의를 상찬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들뢰즈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한 급진적인 반대를 표명하고, 또 이스라엘을 완곡하게 옹호하는 국제적인 합의에 저항하기 위한 "역사적인 위인"이 바로 아라파트라고 말한다.

 

(2) 야세르 아라파트는 1929년 출생하여 2004년 사망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가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초대 수반(1996~2004)이었으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의 의장(1969~2004)이었다. 아라파트는 1993년 오슬로 협정의 의의를 인정받아 1994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한 바 있다. 이스라엘에 의해 추방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1964년 창립된 PLO는 창립 초기에는 유명무실한 단체에 불과하였으나, 1969년 야세르 아라파트가 의장이 되면서 무장투쟁을 위한 민족해방운동단체로 변모하였다. 아라파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를 적극적인 투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해방과 독립을 향한 열망을 이끄는 인물로 평가받지만, 이스라엘은 그가 단지 폭력을 행사할 뿐인 테러리스트들의 수장이라고 여기며, 혹은 아라파트가 오슬로 협정에서 이스라엘 정부에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 팔레스타인 정치가로서,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민족 자결권을 위해 한평생 헌신적으로 투쟁하던 아라파트는, 2004년 원인 미상의 질병으로 사망한다(이스라엘에 의한 방사능 물질 독살 의혹이 있다).

 

   레바논은 이전부터 대다수가 기독교 마론파 교인으로 이루어진 중동 제1의 기독교 국가(현재의 산악 레바논 지역)였으나, 오스만 제국에 점령되었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자치령이 되면서 시리아 영토 일부와 병합,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레바논 내 무슬림 인구 비율이 기독교도 인구 비율과 거의 동등하거나 더 커졌으며, 이는 레바논 독립운동의 계파 분열로 이어져 독립 이후에도 종교 간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그리고 독립 이후에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무슬림 인구가 기독교도 인구를 크게 앞질러 기독교도 인구 비율은 1/3까지 감소하게 되지만, 레바논의 주류는 여전히 기독교 계열 정파가 차지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창립 초기에는 요르단에 거점을 두었던 PLO가 요르단 정부와의 마찰(검은 9월 사건) 1970년 이후 레바논으로 거점을 옮겼다.

 

   결국, 1975년 기독교 마론파의 이권 독점에 대한 이슬람 시아파 주민들의 저항을 시작으로 레바논 내전이 발발한다. 이 내전은 시작부터 레바논 기독교 계열 정당인 팔랑헤당 소속 민병대를 비롯한 각 종교 분파 계열 민병대와 PLO가 대립하며 혼전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레바논 정부가 중동 제2의 기독교 국가인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원조를 받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도중에 레바논 내 갈등에 휘말린 시리아와 이스라엘도 대립하게 되면서, 서서히 레바논 내전은 레바논을 전쟁터로 삼은 레바논, 이스라엘과 시리아 그리고 PLO 사이의 전쟁이 되었다.

 

   1990년까지 진행된 이 내전에서 국제사회에 가장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 바로 1982 9 16일에서 18일 사이에 베이루트에서 벌어진 사브라-샤틸라 학살 사건이다. 사브라는 베이루트의 지역 이름이고, 샤틸라는 사브라 근처 난민촌으로 PLO의 전투원 훈련 장소 중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방위군의 지원을 받은 팔랑헤당 소속 민병대에 의한 학살 사건으로,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난민과 레바논 시아파 주민들로 이루어진 민간인이 약 460명에서 3,500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산된다. 팔랑헤당 민병대가 증거인멸을 위해 고의로 사체를 훼손한 경우가 많아 정확한 추산은 불가능하며, 사후 조사에서 광범위한 전쟁 범죄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학살은 레바논 기독교 우익 정당 카타이브의 당수이자 레바논 신임 대통령으로 당선된 바시르 게마옐 암살의 배후를 PLO로 오인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휴전협정을 어기고 레바논을 재침공, 사브라와 샤틸라를 봉쇄하였고 카타이브의 지령을 받는 레바논 민병대의 학살을 적극적으로 지원 및 감독했으며, 사브라 및 샤틸라의 난민들은 탈출도 하지 못한 채 학살당했다. 1983 UN은 결의안을 통해 이 사태는 명백한 집단 학살일뿐더러 그 책임은 이스라엘에 있으며, 이스라엘 군인들이 학살이 진행 중임을 명백히 인지하였음에도 그것을 멈추지 않았고 이 책임 또한 이스라엘 국방장관에게 있다고 힐난하였다.

 

   레바논 내전 도중인 1983 11월에는 레바논 북부의 해안 도시 트리폴리에서 PLO와 야세르 아라파트를 향한 포위 공격이 있었다. 리비아군의 지원을 받은 반PLO 팔레스타인 세력은 시리아군과 연합하여 트리폴리 외곽을 포위, PLO의 거점을 공격했다. 아라파트가 이끄는 무장 세력은 거세게 저항했으나 트리폴리 바깥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가 차단되었고, 트리폴리 내에서도 아라파트에 반대하는 친시리아 무장봉기가 발생하였다. 11월 말, 결국 아라파트는 항복을 선언하고 PLO가 시리아에서 철수한다는 협상에 동의하였다. 아라파트의 세력은 미국과 아랍국가들로부터 철수 시에 무장 해제에 따른 안전을 약속받았으나, 이스라엘 해군이 트리폴리를 포격하면서 프랑스 및 그리스 해군의 보호 아래 대피해야만 했다. 트리폴리 전투 첫 주에만 최소 250명이 사망하고 400명이 부상을 당했다. 최종적으로 500명이 사망하고 1,50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또한 PLO에서는 200여 명이 사망하고 2,000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트리폴리 인구 50만여 명의 절반이 이재민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이 전투로 인해 팔레스타인 세력은 반PLO파와 친PLO파로 분리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아라파트는 이 전투 이후에도 PLO의 독립 노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야세르 아라파트의 위대함 (GRANDEUR DE YASSER ARAFAT)[각주:1]

 

   팔레스타인 대의[각주:2]는 무엇보다도 그 민중들이 겪어왔고 또 쉼 없이 겪고 있는 총체적인 불의함들, 폭력 행위들뿐 아니라 그 행위들을 뒷받침하거나 정당화한다고 과신하는 부조리한 말들, 거짓된 논증들과 가짜 보증들에 앞선다. 아라파트는 사브라-샤틸라 학살 당시 지켜지지 않은 약속과 협정 위반에 대해서 한 마디만을 남겼다. “수치”, “수치스러운 줄 알라.” (Shame, Shame.)

 

   집단 학살(génocide)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 시작부터 수많은 오라두르[각주:3]를 포함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시오니즘적 테러리즘은 단지 영국에 대항해서 실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멸되어야만 했을 아랍인 마을들에 대해서도 행해졌는데, 이르군(Irgun)이 이 점에 대해 아주 적극적이었다.(데이르 야신)[각주:4] 처음부터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민중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뿐 아니라 전혀 존재한 적이 없던 것인 양 구는 것이 문제이다.

 

   정복자들은 그들 자신이 역사상 가장 큰 집단 학살을 겪어온 자들이다. 그 집단 학살을 시온주의자들은 어떤 절대 악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큰 집단 학살을 절대 악으로 변환하는 것은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시각이며, 역사적인 시각이 아니다. 이는 악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악을 전파하며, 다른 무고한 이들에게 그 악을 돌리고, 유대인들이 겪었던 일들(추방, 게토에의 수감, 민족의 소멸)의 일부를 그 다른 이들이 겪게 만듦으로써 보상을 요구한다. 집단 학살보다 훨씬 더 차가운 방식으로, 그들은 똑같은 결과에 다다르기를 원한다.

 

   미국과 유럽은 유대인에게 배상을 빚지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모든 홀로코스트에 대해 특이적으로 무고하며 심지어 그게 무엇인지 들어본 적도 없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민중들로 하여금 그 죗값을 대신 치르도록 만들었다. 바로 여기에서 기괴한 일이, 폭력이 시작된다. 시오니즘 그러니까 이스라엘 국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권리상(en droit) 그들을 인정하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 이스라엘 국가는 팔레스타인 민중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끊임없이 부정하고자 한다. 그들은 절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팔레스타인에 있는 아랍인들이라고, 마치 그들이 우연히 혹은 실수로 거기서 발견되었던 것인 양 말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추방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저 바깥에서 왔던 것처럼 굴 것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스스로 이끌었던 최초의 항쟁[각주:5]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히틀러의 후예들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의 현존을 사실상 부정할 권리를 확보해 두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대의를 옹호해 온 모든 사람을 짓누를 수밖에 없는 어떤 허구가 시작되고 점점 더 확장된다. 그 허구, 이 이스라엘의 내기란 이 시온주의적 국가의 행동과 사실상(de fait)의 조건들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모든 이들을 반유대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이런 전략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정치적 차가움에서 자원을 얻는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비우겠다는 자신의 목표를 숨기지 않았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가 비어있었고, 오래전부터 언제나 시온주의자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었던 땅인 척한다. 이는 명백히 식민화에 관한 문제인데, 19세기 유럽적인 의미로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 나라의 거주민들을 착취하지 않았고, 그들을 쫓아냈기 때문이다. 남아있는 이들은 영토에 종속된 노동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게토에 수용된 이주민들처럼 고정되지 않고 분리된 노동력이 되었다. 아예 처음부터 거주자가 없거나 비워질 수 있다는 조건으로 땅을 매입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종청소, 집단 학살이지만 지리학적 퇴거에 종속된 채로 있는 물리적인 절멸이며, 팔레스타인 생존자들은 단지 일반적인 아랍인이 되어 다른 아랍 사람들에 섞여서 살아가야 했다. (이스라엘군이 직접 나서지 않고) 무슨 용병들에게 위탁되었던 것이든 아니든 간에, 물리적 절멸은 완전히 현실이다. 그것이, 그들 말대로 집단 학살이 아니라면, 그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것은 단지 여러 수단 중 하나이다.

 

   미합중국과 이스라엘의 암묵적인 공조는 단지 시온주의자들의 로비의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다. 엘리아스 산바르는 어떻게 미국이 이스라엘 속에서 그들의 역사 속 한 국면을 발견해내었는지 잘 보여주었다. 인디언의 말살, 거기서도 역시 부분적으로만 직접적으로 물리적일 뿐이었다.[각주:6] 텅 비우는 것, 그들을 내부의 이주민과 마찬가지로 만들었던 게토 안에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인디언들이 전혀 없었던 양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측면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새로운 인디언들, 이스라엘의 인디언들이다.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자본주의에 두 가지 상보적인 운동이 존재함을 가리킨다. 자본주의는 스스로가 관리하고 착취하는 자기 고유의 체제 내부에 끊임없이 극한들을 부과하며, 그러한 극한들을 항상 더 멀리 떠밀고 자기 고유의 토대를 더 커다랗게 그리고 더 강도있게 재시작하기 위해 그 한계들을 추월한다. 한계를 떠미는 것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작동이었으며, 이는 이스라엘에 의해 아랍 영토 위에 세워진, 아랍의 배후에 있는 위대한 이스라엘이라는 꿈으로 되풀이된다.

 

   어떻게 팔레스타인 민중은 저항할 줄 알았고 또 저항하고 있는가. 어떻게 혈연 관계에 불과했던 사람들이 하나의 무장한 민족이 되었는가. 과연 어떻게, 국가도 없이 그리고 영토 바깥에서, 단순히 민족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을 구현하는 조직에 몸 바쳐 헌신하고 있는가. 이를 위해서는, 서구식으로 말하자면 거의 셰익스피어에서 튀어나온 듯한 역사적인 위인, 바로 아라파트가 필요했다. 역사에서 이런 일이 처음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프랑스 사람들이라면 자유 프랑스[각주:7]를 생각할 텐데, 차이점이라면 자유 프랑스의 경우 처음에는 대중적 기반이 미약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결책 혹은 해결책의 한 요소가 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그리고 다 알면서도 파괴했던 것이 역사에서 처음 일어난 것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권리상 뿐만 아니라 사실상으로도 부정하는 종교적 입장을 고수해왔으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바깥에서 온 테러리스트들로 취급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테러리즘을 세탁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런 이들이 아니며 마치 유럽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것처럼 다른 아랍인들과는 다른 특수한 민중이기 때문에 그들은 아랍국가들의 자발적으로 하는 모호한 지원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팔레스타인 모델이 그들에게 위험한 것이 되었을 때마다 그 지원은 때때로 적의와 절멸로 돌아오곤 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 모든 지옥 같은 역사의 순환을 뚫고 나왔다. 가능했던 해결책이 번번이 좌절되고, 희생을 감수해 가며 얻어낸 동맹이 뒤집어지고, 가장 공식적인 약속이 깨져버렸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저항을 자라나게 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사브라-샤틸라 학살의 목적 중 하나는 아라파트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라파트는 단지 미합중국 그리고 이스라엘까지도 그들 가족의 안전을 완전하게 보장하는 조건으로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은 부대의 투사들이 레바논을 떠나도록 승인했을 뿐이었다. 그 학살 이후, “부끄러워하라(shame)”는 말 외에는 할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에 잇따르는 위기가 초래하는 결과가, 장기적으로든 단기적으로든 간에, 아랍국가들에 통합되거나, 이슬람 근본주의에 융화되는 것이라면, 그때 팔레스타인 민중은 사실상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 세계, 미합중국이 그리고 심지어 이스라엘까지도, 오늘날까지 아직 가능한 채로 남아있는 것을 포함하여, 놓쳐버린 기회들을 아깝게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에서나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민족들과는 같은 민족이 아니다라는 이스라엘의 오만한 사고방식을 향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Études Palestiniennes)지의 창간호가 내보인바 있는 그들의 외침으로 끊임없이 응답한다. “우리는 다른 민족들과 같은 하나의 민족이다. 우리는 그저 그러기만을 원할 뿐이다 ...”

 

   레바논에서 테러리즘적 전쟁을 주도하면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제거했다고, 이미 그들의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 민중의 그들을 향한 지지를 박탈해 냈다고 믿었다. 이스라엘은 어쩌면 나름의 성공을 거둔 것일지도 모른다. 트리폴리 포위의 결과 아라파트가 가진 것들, 어떤 고독한 위대함 속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오직 아라파트의 물리적 현전만이 남아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민중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죽음을 이용하고 이스라엘과 맺은 모든 평화 조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국가와 종교에 의한 이중적 테러리즘으로 빠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 스스로는 단지 도덕적인 불화 없이, 경제적인 혼란 없이는 레바논에서의 전쟁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불관용의 전도된 이미지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정치적인 해법, 평화적인 해결은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함께할 때만 가능할 뿐이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그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국가 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소멸은 그저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생존에는 무관심한 맹목적인 힘들(forces)의 승리일 뿐이다.

 

  1. 《팔레스타인 연구(Revue d'Etudes Palestiniennes)》, 10호, 1984년 겨울, p.41-43. 이 글은 1983년 9월에 작성되었다. [본문으로]
  2. [옮긴이]팔레스타인의 명분 혹은 팔레스타인 대의(cause palestinienne)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살던 민중들의 80%인 약 70만여 명을 대대적으로 추방한 나크바(Nakba) 이후 주변 아랍 국가 및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형성된, 팔레스타인 해방을 지지하는 외교적·정치적 합의이다. [본문으로]
  3. [옮긴이] 오라두르 즉 오라두르-쉬르-글란(Ordour-sur-Glane)은 프랑스 누벨아키텐 오트비엔주에 위치한 마을로, 1944년 6월 나치 독일 무장 친위대에 의한 대규모 학살로 폐허가 되었다. 스페인에서 프랑스를 경유하여 철수 중이던 나치 무장 친위대는 오라두르쉬르글란에 도착하자 주민들을 헛간과 교회에 감금한 뒤 방화 및 총기를 이용해 학살하였으며, 도망치려는 이들을 모두 사살하여 어른 435명과 어린이 207명이 사망했다. 일제에 의한 제암리 학살 사건을 연상케 하는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는 어린이 1명을 포함하여 2~3명에 불과하며, 프랑스 정부는 나치 독일의 만행을 기억하기 위해 이 마을을 복구하지 않고 폐허로 방치해놓고 있다.  [본문으로]
  4. (이르군은) 블라디미르 자보틴스키(리쿠드당([옮긴이]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보수우파 정당)의 창립자이기도 한)에 의해 설립된 극단주의 운동의 무장 분파. 메나헴 베긴이 이끌었을 때 이르군은 영국의 지배에 대항하는 만큼이나 아랍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에 대항하는 행동에 앞장섰다. 특히 1948년 예루살렘 근교 팔레스타인 마을(데이르 야신)에서의 학살에 책임이 있으며, 당시 예루살렘의 영국 총독 본부인 데이비드 킹 호텔 폭파 사건을 일으켰다. [옮긴이] 데이르 야신 학살은 1948년 4월 9일 이스라엘 무장 세력이 자행한 학살 사건으로, 데이르 야신 마을을 점령하고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최소 107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살해했으며, 광범위한 전쟁 범죄가 발생하였다. [본문으로]
  5. [옮긴이] 1948년 팔레스타인 전쟁을 말한다. 이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혹은 아랍-이스라엘 갈등의 신호탄이 된 전쟁이었으며, 1947-1948년 팔레스타인 내전과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1차 중동 전쟁)의 두 단계로 전개된 이 전쟁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통치권을 포기한 뒤에 그 지역에 유대민족 단일국가를 설립하고자 한 유대인들과 이에 반대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사이의 마찰로 인해 발생했다. UN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분할통치를 제시했으나, 인구 비율에 비해 이스라엘에 훨씬 유리했던 그 안을 팔레스타인 및 아랍 지도자들은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결국 팔레스타인 내전이 발생, 이후 1차 중동 전쟁으로 확산된다. 이 전쟁으로 수천 명의 군인 및 민간인이 사망하였고, 70만여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였다. [본문으로]
  6. 『팔레스타인 1948, 추방(Palestine 1948, l’expulsion)』, 파리, 1983년 발간된 팔레스타인 연구 출판본. [본문으로]
  7. [옮긴이] 자유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인 비시 프랑스의 설립이 불법적이며 무효라고 생각한 샤를 드골 장군의 BBC 라디오 연설로 저항할 것을 호소함에 따라 모인 이들에 의해 1940년 런던에서 수립된 정부이다. 자유 프랑스 설립 당시에 샤를 드골 장군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 프랑스 설립을 위해 모여든 인사는 매우 적었으며, 당시 프랑스령 식민지 정부 대다수가 비시 프랑스를 지지하고 있었기에 힘든 싸움을 해야 했다. 이후 자유 프랑스는 비시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고 1943년 프랑스 민족 해방 위원회(CFLN)에 가입하게 되며 프랑스 내의 우익 레지스탕스들과도 접촉하였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 이후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의 프랑스 해방군이 파리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면서, 프랑스는 완전히 해방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