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기 전에
(1) 이 글은 들뢰즈가 팔레스타인의 국민시인으로 불리는 마흐무드 다르위시(Mahmud Darwish)가 편집장으로 있는 문예지 《정원(Al Karmel)》지에 다르위시의 요청에 따라 기고한 것이다.
(2) 이 글의 제목이 ‘돌멩이들(Les Pierres)’인 것은 ‘인티파다(Intifada)’와 관계가 있다. 아랍어로 인티파다는 ‘봉기’, ‘항쟁’을 뜻하며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벌인 항쟁을 의미한다. 팔레스타인 바깥에서의 투쟁만큼이나 팔레스타인 지역 내부에서의 투쟁이 절실함을 간파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노동자가 이스라엘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 사건을 계기로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를 일으킨다. 이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 깃발의 사용조차 금지했던 이스라엘의 강력한 식민통치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으며, 노동자 파업과 이스라엘산 상품에 대한 불매 등 광범위한 저항 활동이 나타났다.
인티파다가 커다란 파급력을 갖고 전개되자 이스라엘은 군대를 투입해 이 항쟁을 진압하고자 하였으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돌을 던지는 투석전으로 이스라엘의 총부리에 맞섰다. 이 때 탱크에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소년의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면서 이스라엘 군대의 무자비함이 다시금 전 세계로 알려지기고 세계 각지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연대하려는 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국제적 비난에도 태도를 바꾸지 않고 총과 최루탄 등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잔인하게 진압하였으며, 1차 인티파다 이후 5년 여 동안 약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인티파다의 전개 결과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내에서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와 다른 노선을 걷는 조직이 성장했으며, 내부의 극단주의 세력을 제어하려는 PLO 지도부의 필요와 인티파다를 멈추게 하려는 이스라엘 지도부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며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 ‘두 국가 합의’가 이루어지게 된다.(이 협정은 일방적으로 팔레스타인에 불리한 것이었다. 따라서 협정 이후에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양쪽에서 비판받았고, 2009년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가 집권 후 이행을 거부하면서 사실상 파기된다.)
(3) 가장 널리 알려진 인티파다의 대표적 이미지는 전차에 돌을 던지는 어린이이다. 특히 널리 알려진 사진은 2차 인티파다 중 사망한 어린이 파리스 오데(Faris Odeh, 1985-2000)가 전차에 돌을 던지는 순간을 찍은 사진으로, AP통신 기자에 의해 저 사진이 찍히고 열흘 뒤 돌을 던지던 중 이스라엘 군인의 총에 목을 맞아 숨을 거뒀다.
돌멩이들 (LES PIERRES) 1
유럽은 유대인에게 한없는 빚을 지고 있다. 유럽은 그 배상을 치르기 시작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빚을 무고한 민중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신 갚게 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최근에 지나간 그들의 극심한 고통과, 잊을 수 없는 유럽적인 공포로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했고, 그뿐만 아니라 그 다른 민족의 고통 위에서 그 다른 민족의 돌덩이들로도 그렇게 했다. 이르군(L'Irgoun) 2은 테러리스트라고 명명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영국 총독부를 폭파했을 뿐만 아니라, 마을들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없애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그들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만들었다. 이스라엘 국가는 아주 오래전부터 고대 히브리 민족을 기다려온, 잠들어 있는 돌투성이 땅을 지키고 있던 어디선가 옮겨 온 몇 안 되는 아랍 사람들의 유령만이 있는 텅 빈 땅 위에 세워진 것처럼 여겨졌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망각 속으로 몰아갔다. 그들에게 이스라엘 국가를 권리상(en droit) 인정하기를 명령하면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끊임없이 팔레스타인 민중이 존재한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부정했다.
팔레스타인 민중은 처음부터 그들 자신의 땅, 돌덩이들과 그들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끝나지 않는 전쟁을 홀로 계속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온, 다시 거기로 돌아갈 수 있는 아랍 사람들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최초의 전쟁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이 모든 요르단을 문제에서 풀어줄 것인가? 누가 팔레스타인 사람과 다른 아랍 사람들 사이에 강한 결속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 봤자 유럽의 어느 두 국가 사이에 있는 것보다 더 크지는 않다고 말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팔레스타인 사람이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다른 아랍 사람들이 그들에게 감내하게 했던 것들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 새로운 부채는 어떻게 매듭지어질 것인가? 자기 땅에서 내쫓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적어도 그들의 땅을 여전히 바라볼 수 있는 곳에, 그들 자신과의 최후의 타협으로 환각으로나마 시선을 떼지 않을 수 있는 거기에 정착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대로 그들을 충분히 멀리 떠밀어버릴 수 없을 것이고, 그들을 밤으로, 망각 속으로 처박아버릴 수 없을 것이다.
마을들을 파괴하고, 집들에 폭탄을 던지고, 추방하고, 암살하고. 끔찍한 역사가 새로운 무고한 자의 배후에서 되풀이된다. 사람들이 말하길, 이스라엘 첩보부가 세계로부터 찬사를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첩보 활동과 정치와 긴밀하게 뒤섞여 있다면, 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부 지하드 3의 암살 후에, 이스라엘 관리들은 그들 모두의 이름이 아부라고 진술한다. 이것이 “그들 모두의 이름이 레비(Lévy)”라고 말했던 자들의 그 잔인한 목소리를 떠오르게 하지 않는가...?
어떻게 이스라엘이 이런 상황에서, 병합되고 점령된 영토에서, 식민자 그리고 식민지에서, 광적인 랍비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점령, 끝없는 점령. 던져진 돌멩이들은 안에서,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해도 세계의 어느 한 곳에서 그들에게 부채가 역전되었음을 환기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민중으로부터 온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던진 돌멩이, 그 돌멩이는 그들 자신의 돌멩이들이며, 그들의 나라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돌멩이들이다. 누구도 사람을 하루에 하나, 둘, 셋, 일곱 아니 열 명을 죽임으로써 부채를 갚을 수는 없으며, 제3자와의 합의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제3자는 책임을 회피하며 모든 죽음은 살아있는 자들을 부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영혼 안까지 들어갔고, 거기에 굴을 파고 꿰뚫으면서 그 영혼을 뒤흔들고 있다.
- 이 원고는 1987년 12월 최초의 인티파다가 일어난 직후 문예지 편집장의 요청에 따라 1988년 6월 쓰여졌다. 아랍어로 출간되었으며, 문예지 《정원(Al Karmel)》, 29호, 1988년, p.27-28.에 〈그들이 여전히 그것을 볼 수 있는 거기에〉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본문으로]
- 〈아라파트의 위대함〉 각주 참조. [본문으로]
-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수반 아라파트의 최측근인 아부 지하드는 파타당(Fath,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내 가장 규모가 큰 사회민주주의 및 민족주의 정당이다.)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고, PLO의 부수반 중 하나이자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의 역사적인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인티파다 중에 그는 정치 지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989년 4월 16일, 이스라엘 특공대에 의해 튀니지에서 암살되었다. [옮긴이] 이스라엘은 2012년에야 이 암살이 자신들에 의한 것임을 공식 인정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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